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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역사와지명

부산 고대 역사, 거칠산국은 어떤 곳인가?

by 낭만꽃길 2026. 10.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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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칠산국, 고대 부산의 정치체를 어떻게 볼 것인가

 

거칠산국(居柒山國)은 오늘날 부산의 동래 일대를 중심으로 존재했던 고대 정치체로 이해됩니다. 『삼국사기』에는 신라의 거도가 우시산국과 함께 거칠산국을 공격했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신라의 행정구역을 설명하는 대목에는 동래군의 옛 이름이 거칠산군이었다고 적혀 있습니다. 이 두 기록 덕분에 나라의 이름과 대략적인 위치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칠산국이 언제 성립했고, 어디까지를 다스렸으며, 언제 신라의 군으로 완전히 편입됐는지는 별도의 검토가 필요합니다.

 

이 문제를 살필 때에는 기록에 등장하는 거칠산국, 신라의 행정구역인 거칠산군, 그리고 발굴 유적인 복천동 고분군·연산동 고분군·배산성을 시간 순서에 따라 놓아야 합니다. 이름과 유적은 서로 연결되지만, 모두 같은 시기의 모습을 보여 주지는 않습니다.

 

거칠산국에 관한 기록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삼국사기』 「거도 열전」입니다. 기록에 따르면 거도는 해마다 장토(張吐)의 들에서 병사들에게 말을 타고 달리게 했습니다. 우시산국과 거칠산국 사람들이 이를 익숙한 놀이로 여기자, 거도가 허를 찔러 두 나라를 공격했다는 내용입니다. 이 이야기는 거칠산국을 신라의 남쪽 진출 과정에서 마주한 나라로 기억했다는 점에서 중요합니다. 다만 기록이 사건의 연도나 전투 장소를 확정해 주지는 않습니다.

 

이 일은 탈해이사금 시대의 이야기로 실려 있습니다. 그 연대를 그대로 받아들이면 정복 시점은 1세기가 됩니다. 하지만 초기 신라 기록의 연대에는 검토할 문제가 있고, 고고학 자료가 보여 주는 부산 지역 세력의 변화도 한 번의 정복으로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삼국사기』 주석은 거도의 공격에 반영된 사건을 3세기 후반의 복속으로 해석하면서, 지역 지배층의 자치가 그 뒤에도 이어졌을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정확한 정복 연도가 밝혀진 것은 아닙니다.

 

『삼국사기』 지리지는 한층 분명한 사실을 전합니다. 동래군은 본래 거칠산군이었고, 경덕왕 때 동래군으로 이름을 고쳤다는 것입니다. 개명 시점은 757년입니다. 여기서 ‘국’은 지역 정치체의 이름이고, ‘군’은 신라가 설치한 행정구역의 이름입니다. 거칠산군이 실제로 언제 설치됐는지는 지리지의 이 문장만으로 알 수 없습니다. 지리지에 동래군의 속현으로 적힌 동평현과 기장현 역시 후대 행정구역의 범위를 보여 줄 뿐, 거칠산국의 초기 영토를 그대로 나타내지는 않습니다.

 

현재 복천동의 고분군이 거칠산국의 무덤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고대 동래와 수영 중심의 지역을 거칠산국으로 불렀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나라’의 규모와 중심지는 어디였을까

 

거칠산국의 ‘국’을 오늘날의 국가와 같은 크기로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고대의 소국은 중심 취락과 주변 마을을 바탕으로 지역 수장이 권한을 행사하던 정치체였습니다. 거칠산국의 왕 이름, 인구, 성곽으로 둘러싸인 수도, 정확한 경계는 기록으로 확인되지 않습니다.

 

위치를 동래 일대로 보는 근거는 거칠산국을 언급한 「거도 열전」과 동래군의 옛 이름을 전한 지리지를 함께 읽는 데 있습니다. 여기에 온천천·수영강 유역의 유적 분포를 더하면, 동래 분지와 그 남쪽의 배산·수영강 일대가 중요한 활동 공간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나라의 중심이 존속 기간 내내 한곳에 있었는지, 어느 시기에 어디로 옮겨 갔는지는 아직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복천동 고분군이 보여 주는 힘

 

거칠산국의 실상을 따질 때 가장 먼저 살펴볼 곳은 동래의 복천동 고분군입니다. 이곳에는 2세기부터 7세기 초까지 무덤이 만들어졌고, 특히 4~5세기의 큰 무덤들이 두드러집니다. 금동관, 갑옷과 투구, 장식된 큰칼, 말갖춤 등은 동래 일대에 풍부한 자원과 무력을 갖춘 지배층이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여러 지역과 이어진 유물의 성격에서는 부산이 강과 바다를 통해 교류하던 곳이었다는 점도 읽을 수 있습니다.

 

복천동 무덤의 주인들을 거칠산국 지배층과 연결하는 해석은 설득력이 있습니다. 다만 무덤에서 ‘거칠산국’이라는 국명이 적힌 자료가 나온 것은 아닙니다. 고고학은 이 지역에 강한 세력이 존재했다는 사실과 그 문화의 변화를 구체적으로 보여 줍니다. 그 세력의 이름은 문헌과 지역의 역사를 대조해 추론합니다.

 

복천동 고분의 정치적 성격을 놓고는 견해가 갈립니다. 김태식은 4세기 부산 세력이 가야 계통의 독자적인 문화를 유지했고, 400년 고구려군의 남정 이후 신라와의 관계가 크게 바뀌었다고 해석합니다. 반면 일부 연구자는 복천동 무덤에 나타나는 신라 양식 토기와 금동관을 근거로, 신라의 영향과 통제가 더 이른 시기부터 강했다고 봅니다. 같은 유물을 두고도 무덤의 연대와 신라 양식 유물이 정치적 지배를 뜻하는 정도를 다르게 판단하는 것입니다.

 

연산동 배산 끝자락에 자리한 연산동 고분군 역시 거칠산국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연산동 고분군과 신라 편입의 과정

 

배산 북쪽 능선의 연산동 고분군은 복천동 고분군보다 늦은 시기에 큰 무덤들이 조성된 유적입니다. 갑옷·투구·칼 등은 이곳 지배층의 군사적 성격을 보여 주고, 무덤 구조에는 복천동과 이어지는 특징이 보입니다. 복천동의 유력 집단이 연산동으로 무덤 자리를 옮기며 권력을 이어 갔다는 견해가 나오는 까닭입니다. 신라 계통 유물도 함께 나타납니다.

 

여기서 핵심적인 질문이 생깁니다. 큰 무덤을 계속 만들 만큼 힘이 남아 있었다면 독립국이었을까요, 아니면 신라의 지배를 받으면서 지역을 다스린 수장층이었을까요? 김두철은 연산동 고분군의 독자성과 무장력을 중시해 지역 세력의 자율성을 강조합니다. 백승충은 큰 무덤의 존속만으로 신라의 지배를 부정할 수 없으며, 5세기 중반 이후에는 신라의 영향이 뚜렷했다고 봅니다. 두 견해는 유적 자체보다 복속을 어디까지로 정의할 것인가에서 차이가 납니다.

 

따라서 거칠산국의 신라 편입은 한 해의 사건으로 끝내기보다, 군사적 압박과 영향력 확대, 지역 수장층을 통한 지배, 신라의 군현 설치로 이어지는 과정으로 살피는 편이 자료에 잘 맞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 주석은 5세기 말~6세기 초의 완전한 병합과 530년대 거칠산군 설치를 제시합니다. 이미란의 연구는 6세기 전반까지도 군사거점의 운영과 지방행정체제의 편제를 구별하며, 배산성 축조를 신라의 직접 지배가 자리 잡는 과정과 연결합니다. 세부 연대에는 이견이 있지만, 신라의 영향이 미친 시점과 행정조직을 갖춰 직접 다스린 시점이 같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은 논의를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연산동고분군 부산 연제구 연산동 산 90-19

 

배산성은 거칠산국의 성이었을까

 

배산성은 거칠산국을 이야기할 때 자주 등장합니다. 배산은 온천천과 수영강 유역을 살피기에 유리하고, 북쪽에는 연산동 고분군이 있습니다. 성 안에서는 큰 집수지와 건물터, 성벽, 토기 등이 조사됐습니다. 신라 거칠산군의 행정·군사 중심지였을 가능성도 연구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 조사된 성벽을 곧바로 거칠산국이 쌓은 성벽으로 볼 근거는 없습니다. 성벽과 집수지 등의 축조 시기는 대체로 6~7세기의 신라 시기와 연결됩니다. 한편 배산성 일대에서는 6세기보다 이른 토기가 폭넓게 확인돼, 성을 쌓기 전부터 배산을 이용한 사람들이 있었던 것으로 분석됩니다. 곧, 배산에는 이전 시기의 활동 흔적이 있고, 오늘날 확인되는 산성은 신라의 지배와 깊이 관련됩니다. 이 두 사실을 함께 놓을 때 배산성의 역사적 위치가 또렷해집니다.

 

독로국·장산국·내산국과의 관계

 

거칠산국보다 앞선 부산 지역 정치체를 논할 때에는 『삼국지』에 나오는 독로국(瀆盧國)이 거론됩니다. 기록은 독로국이 왜와 경계를 접했다고 전하지만, 지금의 지명을 제시하지는 않습니다. 독로국을 부산 동래에 두는 견해와 거제도에 두는 견해가 모두 발표됐습니다. 독로국을 동래에 비정하면 거칠산국과 같은 지역 정치체의 앞뒤 이름으로 이해할 여지가 생깁니다. 그러나 두 이름을 직접 잇는 기록은 없으므로, 독로국이 곧 거칠산국의 옛 이름이라는 설명은 하나의 학설로 다루는 것이 정확합니다.

 

장산국(萇山國)과 내산국(萊山國)도 살펴볼 이름입니다. 『삼국유사』에는 동래 일대의 온천을 이야기하면서 장산국과 내산국이라는 명칭이 등장하고,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옛 장산국 또는 내산국의 땅을 신라가 차지해 거칠산군을 두었다고 전합니다. 이 기록들은 동래의 옛 이름에 관한 전승을 보여 줍니다. 다만 훗날 편찬된 책의 지명 설명이므로, 장산국·내산국·거칠산국이 각각 다른 시기에 존재한 세 나라였다는 뜻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서 ‘장산’을 오늘날 해운대 장산 정상으로 곧장 좁혀 잡을 근거도 부족합니다.

 

‘거칠산’이라는 이름의 뜻

 

거칠산의 ‘거칠’을 ‘거친 뫼’와 연결하고, 그 산을 황령산으로 보는 풀이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황령산의 옛 이름으로 거츨산·거칠산이 전해지는 것도 이 해석과 맞닿아 있습니다. 한편 이근열은 ‘거칠’의 말밑을 ‘크다, 많다’는 뜻의 ‘걸다’에서 찾고, 거칠산을 황령산 한 봉우리보다 넓은 산줄기와 관련된 이름으로 해석했습니다. 고대 지명의 소리와 뜻을 되살리는 작업에는 여러 단계의 추론이 들어갑니다. 따라서 황령산설은 유력한 설명으로 소개하되, 그 이름의 뜻과 지리적 범위에는 다른 학설도 있다는 점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종합: 지금까지 어디까지 알 수 있나

 

현재의 자료로는 동래와 온천천·수영강 유역에 강한 지역 세력이 있었고, 그 세력이 가야와 신라 사이의 변화 속에서 신라의 지배체제로 편입됐다는 큰 흐름을 그릴 수 있습니다. 복천동 고분군은 그 세력의 성장과 무력을, 연산동 고분군은 뒤이은 지배층과 신라의 영향이 함께 나타나는 시기를, 배산성은 신라의 지역 거점이 자리 잡는 단계를 보여 줍니다. 757년의 동래군 개명은 그보다 훨씬 뒤에 확인되는 행정상의 변화입니다.

 

가장 큰 미해결 문제는 문헌의 거칠산국을 발굴 자료 속 어느 시기의 어느 집단과 정확히 연결할 것인가입니다. 복천동에서 연산동으로 이어지는 지배층의 관계, 신라의 영향력이 실제 행정권으로 바뀐 시점, 독로국과 거칠산국의 관계가 앞으로도 연구의 중심에 놓일 것입니다. 거칠산국은 한 번의 정복담으로 설명되는 나라라기보다, 고대 부산의 지역 세력이 성장하고 신라에 편입되어 가는 과정을 살펴보게 하는 이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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