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산성지, 부산의 옛 중심을 지킨 산성

오늘 알아볼 유적의 이름은 배산성지(盃山城址)입니다. 배산의 두 봉우리와 그 사이 골짜기를 둘러싼 옛 성터입니다.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4호로, 1972년 6월 26일 지정됐습니다.
문화유산에 등록된 주소인 연제구 연산동 산38-1 일원이고 이후 2024년 5차 발굴은 수영구 망미동 산67-3 일원에서도 이루어졌고, 그동안 위치를 추정하던 배산성의 동쪽·남쪽 성벽을 확인했습니다. 부산박물관도 배산성을 연제구와 수영구에 걸친 고대 산성으로 소개합니다. 망미동의 역사를 살필 때 배산성지를 함께 다루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배산에 성을 쌓은 까닭
배산은 서쪽 봉우리가 해발 254m, 동쪽 봉우리가 246m입니다. 아주 높은 산은 아니지만, 정상에 서면 온천천과 수영강이 만나는 곳을 비롯해 부산의 여러 방향을 살필 수 있습니다. 부산박물관은 이 산의 북쪽에 연산동 고분군, 남쪽에 동래고읍성지가 자리한다고 설명합니다. 바다 쪽에서 동래로 들어오는 길과 내륙으로 이어지는 길을 함께 바라볼 수 있는 자리입니다.
배산성은 정상만 둥글게 두른 성이 아닙니다. 두 봉우리 사이의 골짜기까지 성 안에 넣고, 산의 7부 능선을 따라 성벽을 쌓은 포곡식 산성입니다. 골짜기를 품으면 성 안에 건물을 세우고 물을 확보할 공간도 마련할 수 있습니다. 실제 발굴에서도 큰 건물터와 물을 모으던 집수지 두 곳이 확인됐습니다. 배산성을 단순한 망루나 피난처보다 규모 있는 거점으로 보는 까닭입니다.

‘잣뫼산’이라는 옛 이름
배산의 이름에도 성의 흔적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1911년 무렵 작성된 『조선지지자료』에는 망미동 쪽 산 이름이 ‘잣뫼산’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지명 연구에서는 ‘잣’을 성, ‘뫼’를 산을 뜻하는 옛말로 풀이합니다. 곧 ‘성이 있는 산’이라는 뜻입니다. 잣뫼가 잔메처럼 불리다가 한자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배산(盃山)이라는 이름이 생겼다는 해석입니다. 오늘날의 이름을 지형의 생김새만으로 풀이하는 것보다, 산 위 성터와 연결해 살펴보게 하는 자료입니다.
처음에는 흙으로 쌓은 성으로 알았습니다
배산성에 대한 이해는 발굴이 진행되면서 크게 달라졌습니다. 1977년 지표조사에서는 정상 가까이에 둘레 약 210m의 안쪽 성, 그 바깥에 약 300m의 성이 있는 이중 토성으로 보았습니다. 무너진 성벽이 흙에 덮이고 산의 경사면과 섞여 있어 돌로 쌓은 본래 모습을 알아보기 어려웠던 것입니다.
2009년 정밀측량에서는 성의 범위가 훨씬 넓게 잡혔습니다. 당시 추정한 성벽 둘레는 약 1,170m, 성 안의 면적은 약 **41,823㎡**입니다. 2016년 시굴조사는 돌로 쌓은 성벽과 성벽 아래를 받치는 보강 시설을 확인했습니다. 이후 발굴로 배산성의 중심 성벽이 신라의 석축 산성이라는 점이 분명해졌습니다. 참고로 41,823㎡는 측량에서 추정한 성의 범위이고, 연제구가 안내하는 31,153㎡는 문화유산 지정 면적이어서 서로 다른 수치입니다.
성벽에서도 시간의 흐름을 읽을 수 있습니다. 2019~2020년 조사에서는 남아 있는 높이가 최대 약 5m인 성벽이 확인됐습니다. 처음 쌓은 부분에는 넓적한 돌을 올리고 아래쪽에 돌을 덧대어 무너짐을 막았습니다. 뒤에 고쳐 쌓은 부분에는 돌을 한 단씩 안쪽으로 물려 쌓는 방식이 나타납니다. 연구자들은 이를 삼국시대에 처음 쌓은 성벽을 통일신라시대에 다시 손본 흔적으로 해석합니다. 배산성은 한때 세웠다가 곧 버린 성이 아니라 여러 시기에 걸쳐 쓰고 고친 성이었습니다.

성 안의 큰 물 저장시설
배산성 발굴에서 가장 눈길을 끈 곳은 집수지 두 기입니다. 집수지는 빗물이나 주변에서 흘러드는 물을 모아 쓰던 시설입니다. 두 곳 모두 둥근 모양이며, 가장자리를 계단처럼 돌로 쌓았습니다. 바닥과 벽체 주변에는 점토를 다져 물이 새는 것을 막았습니다. 2호 집수지는 안쪽 지름이 약 13m로 조사됐고, 영남의 신라 산성에서 확인된 원형 집수시설 가운데서도 규모가 큽니다.
발굴 과정에서는 대나무로 엮은 발과 돗자리, 나뭇잎 등도 나왔습니다. 그중 돗자리와 낙엽은 흙을 다지고 구조물을 안정시키는 부엽공법과 관련됩니다. 물을 저장할 자리를 파고, 돌과 점토로 형태를 만들고, 무너지기 쉬운 부분을 보강한 흔적입니다. 집수지는 성 안 사람들의 생활을 보여주는 동시에 당시의 토목 기술을 전해 줍니다.
나무쪽에 남은 행정 기록
집수지에서는 글씨를 적은 나무쪽인 목간 두 점도 발견됐습니다. 부산에서 처음 확인된 목간입니다. 특히 2호 집수지에서 나온 목간에는 ‘을해년(乙亥年)’이라는 글자와 대판고촌(大板古村)의 곡물 등이 드나든 내용을 정리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물품을 보관하고 수량을 관리하던 장부 성격의 문서로 풀이됩니다. ‘을해년’이 정확히 어느 해인지는 확정되지 않았으며, 555년·615년·675년 등이 검토돼 왔습니다.
성벽은 이곳이 방어에 쓰였음을 말해 주고, 목간은 그 안에서 기록을 작성하고 물품을 관리했음을 보여줍니다. 여기에 토기와 기와, 큰 건물터까지 더하면 배산성에는 군사 활동과 함께 행정 업무, 사람들의 일상이 있었음을 그려 볼 수 있습니다.
큰 건물터가 말해 주는 것
2018년 2차 발굴에서는 집수지에서 서쪽으로 약 30m 떨어진 경사지에서 높이 약 6m의 건물 축대와 길이 약 12.8m, 너비 10m의 건물터가 확인됐습니다. 경사진 산비탈을 평평하게 만들기 위해 축대를 높이 쌓고 그 위에 건물을 세운 것입니다. 건물터에서는 기둥을 받치던 초석과 배수시설도 발견됐으며, 증축하거나 고쳐 쓴 흔적도 확인됐습니다. 집수지와 건물터를 함께 보면 성 안의 공간을 계획적으로 조성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거칠산국의 성이었을까요?
배산성지를 소개할 때 거칠산국과 거칠산군이 함께 등장해 혼동하기 쉽습니다. 옛 문헌에는 동래 일대와 관련된 거칠산국 이야기가 전하고, 신라의 행정구역인 거칠산군은 757년 동래군으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문헌에 거칠산국이 나온다는 사실만으로 지금 발굴된 배산성벽을 곧바로 거칠산국 사람들이 쌓았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성벽의 축조법과 출토 유물을 바탕으로 한 현재의 주된 해석은 신라가 6세기 무렵 배산성을 쌓았다는 것입니다.
그보다 앞선 배산의 역사도 주목할 만합니다. 2024년 토기 연구에서는 성을 쌓기 이전인 6세기 이전의 토기가 배산 여러 곳에서 나왔다는 점을 살폈습니다. 이는 성이 들어서기 전부터 사람들이 이 산을 이용했을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북쪽의 연산동 고분군 역시 배산 주변 고대사에서 중요한 유적입니다. 다만 옛 토기가 발견된 시기와 지금 확인된 성벽의 축조 시기는 구별해서 읽어야 합니다.
배산성이 거칠산군의 행정 중심지, 곧 치소성이었을 가능성도 꾸준히 제기됩니다. 큰 건물터와 집수지, 곡물 관리 기록이 적힌 목간은 이 견해를 뒷받침하는 자료입니다. 산성에 관한 직접적인 문헌 기록이 전하지 않는 만큼, 정확한 기능과 운영 방식은 발굴 자료를 통해 계속 밝혀 가는 중입니다.
망미동의 동래고읍성과는 어떻게 다른가
망미동에는 배산성과 함께 알아두어야 할 유적이 하나 더 있습니다. 동래고읍성지입니다. 배산성이 두 봉우리와 높은 산비탈을 둘러싼 산성이라면, 동래고읍성은 배산의 동남쪽 낮은 구릉과 평지에 자리한 옛 읍성입니다. 동래고읍성 안에서는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의 건물터, 우물터 등이 확인됐습니다. 두 유적은 배산을 사이에 두고 이어지는 부산의 오래된 중심지 역사를 보여주지만, 같은 성터는 아닙니다.
두 성의 역할이 시간에 따라 달라졌다는 연구도 있습니다. 배산성이 먼저 부산 지역의 거점으로 쓰이다가, 산 아래 동래고읍성이 자리 잡으면서 그 뒤를 지키는 산성의 역할을 했다는 해석입니다. 동래고읍성의 정확한 축조 시기에는 연구자 사이에 견해 차이가 있지만, 배산성의 성벽을 여러 차례 고쳐 쓴 흔적은 두 유적의 관계를 살피는 중요한 단서입니다.
2024년 발굴이 더한 망미동의 이야기
2024년 5차 조사는 배산성의 동쪽에서 남쪽으로 이어지는 성벽선을 찾는 데 초점을 맞췄습니다. 연산동뿐 아니라 망미동 산67-3 일원을 조사해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시대에 걸친 성벽 구조를 확인했고, 토기와 기와, 화살촉 등 유물 약 180점을 수습했습니다. 돌이 모인 시설과 배수시설로 추정되는 석축도 조사됐습니다. 예전에는 지표의 흔적으로 짐작하던 성의 남쪽 경계에 발굴 근거가 더해진 것입니다.
오늘날 배산성지의 일부 성벽과 집수지는 정비·복원돼 있습니다. 산길을 걷다 만나는 돌축대와 물 저장시설은 부산의 고대사가 책 속에만 있는 이야기가 아님을 보여줍니다. 북쪽의 연산동 고분군, 산 위의 배산성, 동남쪽 망미동의 동래고읍성을 함께 놓고 보면 이 일대가 오랜 시간 부산의 중요한 자리였다는 사실이 한층 또렷해집니다.
참고자료
- 연제구, 「배산성지」
- 부산박물관, 「배산성지 1차 문화재 발굴조사」
- 부산박물관, 「배산성지 2차 문화재 발굴조사」
- 부산박물관, 「배산성지 3차 문화재 발굴조사」
- 부산시, 『배산성지 Ⅰ』 발간 보도자료
- 부산시, 배산성지 5차 시굴조사 기록 영상 안내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배산성지」
- 안성현, 「부산 배산성의 성격」, 『항도부산』 48, 2024. 논문 정보
- 김현우, 「부산 배산성 토기의 출토맥락과 시간적 위치에 대한 고찰」, 『항도부산』 48, 2024. 논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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