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부산을 빛낸 인물 36인
부산광역시가 2004년에 펴낸 『20세기 부산을 빛낸 인물(Ⅰ)』목록만 정리한 것입니다. 민족운동·종교·사회활동·학술·언론·교육 분야의 인물 30명과 부산 지역 항일운동 사례를 다루며, 사건 항목에는 지역 운동을 이끈 인물들도 나옵니다. 아래는 책에 실린 인물 36명을 분야별로 정리한 내용입니다. 부산에서 태어난 사람뿐 아니라 부산과 깊은 인연을 맺고 활동한 인물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부산을 이해하는 중요한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민족운동·항일운동
김갑(金甲)
본명은 김진원이며, 1889년 동래에서 태어났습니다. 동명학교를 졸업한 뒤 대동청년단에 참여했고, 1917년 상하이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이어갔습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교통·법무·노동·재무 관련 직책을 맡았고, 국민대표회의와 민족유일당 운동에도 참여했습니다. 1930년 한국독립당 창당을 주도했으며, 1933년 상하이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정부는 1986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습니다.
김명규(金明奎)
1895년 동래에서 태어나 밀양에서 성장했습니다. 1919년 동래고보 학생들의 3·13 만세운동을 준비하고 지원한 혐의로 징역형을 받았습니다. 출옥 뒤에는 의열단 핵심 인물 황상규와 연락하며 독립운동 자금 마련에 나섰고, 이 과정에서 다시 체포되어 7년간 옥고를 치렀습니다. 이후 동아일보 밀양지국 기자로 활동했습니다. 정부는 독립운동 공훈을 기려 건국포장을 추서했습니다.
김법린(金法麟)
경북 영천에서 태어나 범어사에서 불교를 공부하고 출가한 승려입니다. 불교중앙학림에 재학하던 1919년 3·1운동에 참여했고, 범어사 항일의거를 이끄는 데에도 힘을 보탰습니다. 이후 불교 혁신과 민족운동, 교육에 두루 참여했습니다. 해방 뒤에는 문교부장관과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위원장 등을 맡았고, 동국대학교 총장으로 학교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불교계의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정치 활동가로 평가받습니다.
김병태
1899년 부산 좌천동에서 태어났습니다. 일제강점기 우리 역사를 배울 수 없게 되자 최천택·박재혁 등과 함께 『동국역사』를 비밀리에 인쇄해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비밀결사 구세단과 의열단에서 활동했고, 중국으로 건너가 항일운동에 참여했습니다.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에 편입된 뒤에는 인도 파견 공작요원으로도 선발됐습니다. 광복을 앞두고 중국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습니다.
박영출(朴英出)
1908년 기장에서 태어났습니다. 독립운동을 지원한 집안에서 자라 기장 지역의 항일운동과 청년운동을 가까이에서 접했습니다. 박영출은 민족의 독립과 사회적 평등을 함께 지향하며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에 참여했습니다. 일제 경찰은 그를 노동조합 조직 활동과 관련해 체포했고, 1936년 징역 4년형을 선고했습니다. 책은 그를 사회주의 사상을 가졌지만 민족의 독립과 문화 발전을 먼저 실천하려 한 청년운동가로 소개합니다.
박재혁(朴載赫)
1895년 부산진에서 태어난 의열단원입니다. 학생 시절 최천택·김병태 등과 『동국역사』를 인쇄해 배포했고, 비밀결사 구세단에도 참여했습니다. 1920년 중국인 고서상으로 가장해 부산경찰서에 들어가 폭탄을 던져 경찰서장 하시모토를 숨지게 했습니다. 이 사건은 의열단의 부산경찰서 폭탄 의거로 알려져 있습니다. 박재혁은 현장에서 체포되어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 1921년 순국했습니다.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습니다.
박차정(朴次貞)
1910년 동래에서 태어난 여성 독립운동가입니다. 일제강점기 여성운동과 민족해방운동에 함께 참여했으며, 중국으로 건너가 조선혁명당과 조선의용대 등에서 활동했습니다. 여성들이 민족해방운동의 주체로 나서야 한다고 보고 부녀자 조직과 훈련에도 힘을 쏟았습니다. 1939년 곤륜관 전투에서 입은 부상의 후유증으로 1944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독립운동과 여성해방을 함께 실천한 인물로,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습니다.
안희제(安熙濟)
백산 안희제는 학교를 세워 민족교육을 펼치고 대동청년단을 조직한 독립운동가입니다. 부산에서 백산상회를 운영하며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고 해외 독립운동을 지원했습니다. 언론과 협동조합 활동에도 참여했으며, 만주에서는 발해농장을 경영해 독립운동의 기반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말년에는 대종교를 중심으로 민족운동을 이어갔습니다. 교육·경제·언론·종교 활동을 독립운동과 연결한 인물로, 부산을 대표하는 민족운동가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양한나(梁漢那)
1892년 부산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 상하이에서 독립운동가들을 도왔습니다. 해방 뒤에는 여성의 사회 참여와 복지 활동에 힘썼습니다. 1946년 서울여자경찰서 초대 서장을 맡았고, 부산으로 돌아온 뒤에는 부산YWCA를 창립해 초대 회장을 지냈습니다. 전쟁고아와 갈 곳 없는 여성들을 돌보기 위해 자매여숙을 세웠으며, 이 사업은 훗날 자매정신요양원으로 이어졌습니다. 양한나는 여성운동과 사회복지 현장에서 평생 이웃을 돌본 실천가입니다.
윤현진(尹顯振)
1892년 양산에서 태어나 구포구명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경남은행에서 일하다가 3·1운동 뒤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했습니다. 임시정부에서 재무위원장과 재무차장을 맡아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고 정부 운영을 뒷받침했습니다. 안창호 등과 함께 재정 기반을 마련하는 방안을 고민했으며, 임시정부의 초기 활동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1921년 2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장례는 임시정부 국장으로 치러졌습니다.
이봉우(李鳳雨)
1873년 부산 좌천동에서 태어났습니다. 궁내부 기사로 일하다가 을사늑약 이후 관직을 그만두고, 1908년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 기반을 만드는 데 힘을 쏟았습니다. 김약연 등과 함께 명동중학교를 세우고 여러 민족학교와 강습소를 운영해 청년들을 길렀습니다. 1919년 대한독립선언서에 대표자로 이름을 올렸고, 간도 지역 독립운동 단체에서도 활동했습니다. 아들들까지 항일운동에 참여한 독립운동가 집안의 중심인물이었으며,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습니다.
장건상(張建相)
1883년 경북 칠곡에서 태어났지만 어린 시절 부산 좌천동에서 성장했습니다. 중국으로 건너가 동제사에 참여하고, 상하이 임시정부와 여러 독립운동 단체에서 활동했습니다. 독립운동의 방법과 임시정부의 운영 방향을 두고 다양한 노선에 참여했으며, 민족운동 세력의 통합을 꾸준히 모색했습니다. 해방 뒤에는 임시정부 계열 인사로 귀국해 민족 분열을 막고 독재에 맞서는 정치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책은 그의 비타협적인 항일운동과 좌우를 아우르려 한 노력을 함께 평가합니다.
최천택(崔天澤)
1896년 부산 좌천동에서 태어나 한평생 부산을 중심으로 활동했습니다. 학생 시절 『동국역사』 배포와 구세단 활동에 참여했고, 박재혁의 부산경찰서 폭탄 의거를 도왔습니다. 이후 부산청년회와 신간회 부산지회에서 활동하며 청년운동과 언론운동을 펼쳤습니다. 해방 뒤에도 통일운동과 반독재 민주화운동에 참여했습니다.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이후까지 부산을 떠나지 않고 지역의 민족·사회운동을 이끈 인물입니다. 2003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습니다.
한형석(韓亨錫)
1910년 동래에서 태어난 독립운동가이자 작곡가·극작가입니다. 아버지 한흥교를 따라 중국에서 생활하며 항일운동에 참여했고, 한국광복군에서 활동했습니다. 독립을 주제로 한 군가와 항일가극을 만들어 광복군과 동포들의 사기를 북돋웠습니다. 광복 뒤 부산에 정착해 자유아동극장을 운영하는 등 어린이 문화와 복지 활동에도 힘썼습니다. 정부가 예술 분야의 고위직을 제안했을 때 이를 사양한 일화도 전해집니다. 1996년 세상을 떠났으며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습니다.
한흥교(韓興敎)
1885년 동래에서 태어난 의사이자 독립운동가입니다. 일본에서 의학을 공부하던 중 중국 혁명에 참여하기 위해 상하이로 건너가 적십자 구호대에서 부상자를 치료했습니다. 신규식 등과 동제사를 조직했고, 이후 중국에서 병원을 운영하며 독립운동가들을 도왔습니다. 신문과 기관지를 발행하고 임시정부와 의열단의 연락 업무도 맡았습니다. 귀국 뒤에는 동래에서 대동병원을 운영하면서 지역 사회운동에 참여했습니다. 전면에 나서기보다 치료와 자금·연락 지원으로 독립운동을 뒷받침한 인물입니다.
[지역 항일운동을 이끈 인물]
윤정은(尹正殷)
1852년 태어나 1919년 구포장터 만세운동을 이끌었습니다. 당시 62세였지만 청년들을 찾아다니며 독립운동을 격려하고 시위에 앞장섰습니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3개월을 선고받았고, 옥중에서 가혹한 고문과 수감 생활을 견디지 못해 1920년 순국했습니다. 정부는 그의 항일운동 공훈을 기려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습니다. 구포 지역 만세운동에서 나이와 신분을 넘어선 결기를 보여준 인물입니다.
구수암(具壽巖)
1901년 기장에서 태어나 1919년 4월 5일 기장읍 장날 만세운동에 참여했습니다. 동지들과 독립선언서 400여 장을 인쇄하고 대형 태극기와 깃발을 준비해 장터에서 선언서를 나눠주며 시위를 이끌었습니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고, 옥중에서 얻은 병과 고문의 후유증으로 1920년 20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정부는 1992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습니다. 짧은 생애를 기장 지역 독립운동에 바친 청년입니다.
김도엽(金度燁)
1899년 기장 대라리에서 태어났습니다. 1919년 4월 기장읍 장날 만세운동을 준비하며 동지들과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태극기와 독립을 호소하는 깃발을 만들었습니다. 장터에 모인 군중에게 선언서를 나누고 만세시위를 이끌다 체포되어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았습니다. 출옥 뒤에도 항일운동을 이어갔고, 1930년 중국으로 망명해 활동하다가 다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습니다. 결국 감옥에서 얻은 병으로 1937년 세상을 떠났으며,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습니다.
김상헌(金祥憲)
범어사 지방학림을 마친 뒤 서울 불교중앙학림에서 공부하며 만해 한용운이 이끈 유심회에 참여했습니다. 1919년 3·1운동 계획을 듣고 범어사로 내려와 서울의 상황을 전하고, 범어사 명정학교와 지방학림 학생들의 시위를 준비하도록 이끌었습니다. 이후 독립운동 소식과 문서를 국내에 전하고, 철원애국단을 조직해 군자금을 모아 임시정부에 보냈습니다. 1920년 체포되어 징역 3년형을 받았으며, 출옥 뒤 범어사에서 승려 교육에 힘썼습니다.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습니다.
홍재문(洪在文)
1897년 태어나 경성공업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부산공립보통학교 교사로 일했습니다. 1919년 부산진 일신여학교 학생들이 만세운동으로 탄압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학생 배수원과 함께 좌천동 시위를 준비했습니다. 4월 3일 ‘독립만세’ 깃발을 세우고 수백 명의 군중과 함께 시위를 이끌었습니다. 이후 임시정부에 보낼 독립자금을 모으다 체포되어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7년간 옥고를 치렀습니다. 출옥 뒤 상하이에서 지하활동을 이어갔으며, 정부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습니다.
김선갑(金銑甲)
1921년생으로, 1940년 부산 제2상업학교 4학년 때 부산항일학생의거, 이른바 노다이 사건에 참여했습니다. 경남 학도들의 체육대회에서 일본인 심판이 조선인 학교에 불리한 판정을 내리자 학생들이 항의했고, 시위는 일제에 대한 저항으로 번졌습니다. 김선갑은 주동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체포되어 징역 8개월을 선고받았습니다. 출옥한 지 4개월 만인 1942년, 감옥에서 당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21세에 순국했습니다. 정부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습니다.
[종교·사회활동]
경허(鏡虛)
1849년 전주에서 태어난 근대 한국 불교의 선승입니다. 1898년 범어사에 영남 최초의 선원을 열어 수행자들을 지도하고, 범어사가 선찰대본산으로 자리 잡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수행 지침서인 『선문촬요』를 편찬해 선 수행의 길을 널리 알렸습니다. 그는 선과 교를 서로 떼어 놓지 않고 함께 닦아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경허의 가르침은 만공·혜월·한암 등 제자들을 통해 이어졌고, 근대 한국 불교의 선풍을 되살린 인물로 평가됩니다.
동산(東山)
1890년 충북 단양에서 태어난 승려로, 근현대 불교계의 대표적인 선승입니다. 범어사 금어선원에서 수행하고 후학을 가르쳤으며, 훗날 범어사를 중심으로 부산 불교계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일제강점기에 훼손된 승단의 수행 전통을 바로 세우려는 불교정화운동에 앞장섰고, 조계종 종정으로 활동했습니다. 대중에게는 경허의 『선문촬요』를 바탕으로 선 수행을 알기 쉽게 설명했습니다. 1965년 범어사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수행과 교육으로 불교계의 중심을 지킨 인물입니다.
매견시(Mackenzie)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난 호주 장로교 선교사로, 1910년 한국에 와 부산·경남에서 선교와 교육·의료 활동을 펼쳤습니다. 특히 한센병 환자들이 사회에서 버림받던 때 상애원을 운영하며 치료와 돌봄에 힘썼습니다. 대풍자유를 주사약으로 활용하는 치료법을 연구하고, 환자 자녀를 위한 학교와 고아원도 세웠습니다. 부산진 일신여학교 설립에도 참여해 여성 교육에 기여했습니다. 그의 두 딸은 훗날 일신기독병원을 세워 한국에서 의료 봉사를 이어갔습니다.
소재건(Aloysius Schwartz)
미국 출신 가톨릭 사제로, 1957년 부산에 정착해 가난한 아이들과 청소년을 위한 ‘소년의 집’을 세웠습니다. 부모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생활공간과 교육을 제공했고, 마리아수녀회와 그리스도회를 조직해 복지사업을 이어갔습니다. 그의 활동은 부산을 넘어 여러 나라로 확장되어 수많은 아동을 도왔습니다. 막사이사이상과 대한민국 정부 포상 등을 받았으며, 두 차례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되기도 했습니다. 1992년 세상을 떠난 뒤에도 그의 복지 활동은 여러 단체를 통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종률(李鍾律)
1902년 경북 영일에서 태어난 민족운동가이자 사상가입니다.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에 뛰어들었고, 해방 뒤에는 민족자주와 통일을 위한 운동을 이어갔습니다. 부산대학교 교수로 일하며 학생들을 가르쳤고, 민주일보 편집국장과 주필을 맡아 언론 활동도 펼쳤습니다. 자본주의와 민족 문제, 노동자 중심의 사회와 민주적 통치에 관한 생각을 꾸준히 정리했습니다. 부산 지역 민족민주운동의 선각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학문과 정치 활동을 통해 민족의 자주적 통일을 모색했습니다.
장기려(張起呂)
1911년 평안북도에서 태어난 외과의사로, 전쟁 뒤 부산에서 가난한 환자들을 진료하며 ‘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렸습니다. 부산에 무료진료소를 열어 복음병원의 바탕을 마련했고, 환자의 형편에 따라 치료비를 받지 않거나 대신 부담하기도 했습니다. 1968년에는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만들어 저소득층도 적은 비용으로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의학 연구와 수술에 헌신하는 한편, 의료를 어려운 이웃과 나누는 일로 넓혔습니다. 그의 삶은 부산 의료·복지의 중요한 뿌리로 남아 있습니다.
한상동(韓相東)
1901년 경남 김해에서 태어난 목사입니다. 일제강점기 신사참배를 거부해 여러 해 옥고를 치렀고, 신앙과 양심을 지키기 위해 일제의 종교 탄압에 맞섰습니다. 해방 뒤 부산에서 신학교육을 시작하고 고려신학교를 세워 목회자와 신학자를 길렀습니다. 고신대학교의 설립과 발전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종교적 신념을 지키는 데 그치지 않고 부산의 교회와 신학교육을 세우는 일에 평생을 바친 인물입니다. 1976년 세상을 떠났으며, 그의 교육 활동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학술·언론·교육]
박원표(朴元杓)
1910년 부산 영주동에서 태어나 금융계와 지역사회에서 활동했습니다. 부산은행 집회소 사무국장 등을 맡아 부산 금융계 발전에 기여했고, 부산향토문화연구회를 조직해 부산의 역사와 문화를 조사하고 알리는 일에 힘썼습니다. 『부산의 고금』, 『개항 90년』, 『향토부산』 등 지역사 자료를 꾸준히 펴냈습니다. 금융인으로 일하면서도 부산의 옛 모습과 생활사를 기록한 향토사학자였습니다. 그의 저술은 오늘날 부산의 근현대사를 살피는 데 활용되는 지역 자료로 남아 있습니다.
박필채(朴苾彩)
1842년 밀양에서 태어나 동래에서 활동한 유학자이자 교육자입니다. 아버지의 서당에서 한학을 익혔고, 동래의 여러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동래부 면훈장을 맡았으며, 개양학교와 동명학교 등 근대 교육기관의 설립과 운영에도 참여했습니다. 전통 학문을 지키면서도 새 시대에는 외국어와 신학문 교육이 필요하다고 보았습니다. 1925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교육에 힘썼고, 다섯 책의 문집을 남겨 개항기 부산·동래의 사회와 문화를 살필 자료를 전했습니다.
손진태(孫晉泰)
1900년 낙동강 하구 하단에서 태어난 역사학자이자 민속학자입니다. 한국 민속학의 개척자로, 민속 자료를 역사 연구와 연결해 한국인의 생활과 문화를 살폈습니다. 조선민속학회 창립에 참여하고 여러 연구를 발표했습니다. 해방 뒤에는 기존 역사관을 비판하며 평등과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한 ‘신민족주의 사관’을 제창했습니다. 서울대학교 교수와 문교부 차관 등을 지냈습니다. 손진태의 연구는 민속학을 독립된 학문으로 발전시키고 한국사를 새롭게 해석하려 한 시도로 평가됩니다.
우장춘(禹長春)
1898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난 세계적인 원예육종학자입니다. 식물의 종 사이 관계를 밝혀 다윈의 진화론을 보완하는 ‘종의 합성’ 이론으로 국제적 명성을 얻었습니다. 1950년 한국에 돌아와 농업 연구와 종자 개발에 힘쓰며 전후 농업 재건을 도왔습니다. 배추·무 등 주요 작물의 품종 개량뿐 아니라 제주도와 남해안의 감귤 재배 가능성을 알리는 데에도 기여했습니다. “내가 가진 기술은 육종이며, 이 기술로 조국에 힘을 보태겠다”는 뜻을 실천한 과학자입니다.
윤인구(尹仁駒)
1903년 구포에서 태어난 교육자이자 목회자입니다. 해방 직후 부산에 고등교육기관이 절실하다고 보고 국립대학 설립에 앞장섰습니다. 부족한 재정과 시설, 행정 지원 속에서도 부산대학교를 세우고 초대 총장으로 학교의 기반을 다졌습니다. 부산에 필요한 인재를 지역에서 길러야 한다는 신념으로 대학의 운영과 발전에 힘을 쏟았습니다. 부산대학교가 지역을 대표하는 국립대학으로 자리 잡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며, 부산 교육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름입니다.
조명기(趙明基)
1905년 동래 복천동에서 태어난 불교학자이자 교육자입니다.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혜화전문학교에서 교수와 불교학과장을 맡아 불교학 연구와 후학 양성에 힘썼습니다. 원효의 사상과 저술을 연구해 관련 자료를 모으고 정리했으며, 한국불교문화연구소를 세워 불교사 연구의 기반을 넓혔습니다. 1964년 동국대학교 총장에 취임하는 등 교육행정에도 참여했습니다. 불교의 역사와 사상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학술기관과 대학을 통해 그 성과를 이어가려 한 학자입니다.
정중환(丁仲煥)
1914년 동래 북면 노포리에서 태어난 역사학자입니다. 부산에서 오랫동안 살며 부산대학교와 동아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한국 고대사 가운데서도 연구가 부족했던 가야사에 깊이 파고들었습니다. 『가라사연구』를 펴내 한국 가야사 연구의 기반을 넓혔으며, 고대 한일관계사 자료도 번역하고 정리했습니다. 『부산시지』와 『부산시사』, 『동래구지』 등 지역사 편찬에도 참여했습니다. 평생 부산에서 연구와 교육을 이어간 향토 역사학자로 평가받습니다.
최한복(崔漢福)
1895년 수영에서 태어난 교육자이자 향토사학자입니다. 초등학교에서 약 40년간 학생들을 가르쳤고, 말년에는 공민학교에서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위한 야간 교육을 했습니다. 민족정신과 고향 사랑을 중요하게 여겼으며, 수영의 민속놀이와 풍속을 기록하고 알리는 데 힘썼습니다. 그가 정리한 수영야류는 전승과 연구의 바탕이 되었고, 수영팔경을 글로 남겨 지역의 옛 풍경을 전했습니다. 최한복의 기록은 수영의 역사와 문화를 되살리는 데 중요한 자료입니다.
참고 자료: 부산광역시, 『20세기 부산을 빛낸 인물(Ⅰ)』,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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