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釜山)의 역사
부산은 가마부를 사용하여 가마를 닮은 산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부산은 현재 좌천동의 부산포에서 시작되었으며, 조선시대에는 동래가 부산지역의 중심지 역할을 했습니다. 좌천동의 부산은 일제강점기부터 왜관이 두모포(수정동)에 있다 용두산 주변으로 '초량왜관'이란 이름으로 부르며면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지만 부산의 역사는 그 이전보다 훨씬 오래되었으며, 삼한시대 이전에는 현재의 수영구의 망미동이 도읍 역할을 했습니다. 좀더 자세히 부산의 역사를 살펴 보겠습니다.
고대의 부산 역사
고대 부산의 역사는 구석기에서 삼한 시대가지로 보는 것이 옳습니다. 그 이후는 신라가 현재의 경상도 지역을 통치하면서 삼국시대로 전환하게 됩니다. 신라 이전과 이후로 나뉘는 이유는 신라 이전의 역사는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고 도시국가의 형태이기 때문에 온전한 부산의 의미를 담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한 지역으로서의 부산의 정체성은 신라시대로 보는 것이 맞습니다.
구석기시대
부산에 사람이 살았던 최초의 시대는 구석기시대입니다. 해운대 좌동 , 중동, 청사포 유적지 등에서 각종 석기가 발견되었는데 모두 구석기시대의 것입니다. 또한 금정구 노포동에서도 구석기 유물이 발견되어 부산은 매우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거주한 곳으로 보인다.
선석기 시대
선석기 시대로 넘어오면서 부산은 바닷가 중심의 생활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신석기 시대의 흔적으로는 동삼동 조도 영선동 패총에서 신석기시대의 유물이 있습니다.다. 빗살무늬토기와 작살 낚싯바늘 등을 발견했는데 이는 모두 신석기시대의 유물입니다. 한국해양대 입구에 자리한 동삼동 패총에서 이러한 내용을 소개 전시하고 있습니다.
청동기 시대
조도 패총에서는 청동기 시대의 유물도 발견되었습니다. 구연 토기와 삼각형 석축 등 후기 한국 동검과 함께 출토되었습니다. 이것은 영도가 신석기를 비롯 청동기 시절에서 사람들이 거주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어족이 풍부한 탓에 고대로부터 영도는 좋은 거주지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영도는 많은 사람들이 살기에는 식수가 부족하기 때문에 크게 확장 되지 않았던 것이 분명합니다.
철기시대
기원전 150년 전후 약 300년 간을 부산의 철기시대로 봅니다. 이때는 우리나라의 삼한 시대로 삼국시대 초기에 해당됩니다. 부산을 비롯한 한반도의 남동부 지역은 철기 문화의 유입이 늦었고, 청동기 시대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다 서서히 철기 문화가 유입되면서 현재의 동래를 중심으로 발달한 것으로 보입니다.
부산이란 지명은 원래 현재의 초량과 부산진 지역을 말합니다. 일제강정기 이전까지 부산은 시골촌락에 불과했숩니다. 조선시대는 동래를 중심으로 큰 마을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현재 남아 있는 부산의 조선시대 유적은 대부분 동래에 있는 것은 동래가 부산의 수도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삼국시대
삼국 시대 부산은 김해를 중심으로한 금관가야에 속했습니다. 후에는 경주를 중심으로 한 신라에 통합됩니다. 고려시대까지의 부산에 대한 기록은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다만 해운대의 해운이 통일신라 말기 석학인 최치원의 자 해운에서 가져온 것으로 소개됩니다. 하지만 이 부분은 많은 연구가 필요합니다. 최치원에 의해 지어진 지명이 전국에 흩어져 있는 것을 보면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해운이란 글자는 아직도 해운대 동백섬 등대 바로 아래 보존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최치원이 쓴 것인지는 불분명합니다.
고려 시대
고려시대 부산은 그야 말로 외지였습니다. 고려의 수도 개성이 현재의 북한 지역이란 것을 감안한다면 개성에서 부산은 결코 쉽게 갈 수 있는 그런 곳이 아니었습니다. 8세기 신라 경덕왕이 거칠산군을 '동래군'으로 개칭했지만, 고려시대 동래군은 동래현으로 격하되고, 현재의 울산인 울주의 속현이 됩니다. 울주의 속인 동평현(기장군)은 양주(현재의 양산)의 속현이 됩니다. 부산에 대한 별다른 기록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조선 시대
조선시대는 동래현을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1592년 우산 개운포에 있던 경상좌수영이 동래부 남촌면인 현재의 수영동으로 이전하게 되면서 부산의 중요성이 부각됩니다. 임진왜란 이후 동해보다는 동래(현재 부산)가 지리적으로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동해와 남해는 다른 나라가 아닌 왜국(현재의 일본) 외에는 쳐들어올 나라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해 동해가 아닌 남해가 중심지 역할을 해야 합니다.
17-8세기 조선은 일본과 외교적인 연락을 위해 조선통신사를 일본에 보내게 됩니다. 이때 부산이 출발항으로 사용되면서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됩니다. 1895년 포항시, 경주, 울산, 양신, 부산, 거제를 총괄하는 광역행정구역인 동래부가 설치됩니다. 관청은 현재 동래에 두었으며, 동래도호부가 <동래군>으로 전환되게 됩니다.
왜관, 일본인 마을
부산에는 개항 이전에 왜관이라하여 일본인들이 거주하는 마을이 있었습니다. 용두산 공원 근처에 있었고, 동래에 왜란이라 하여 따로 일본인의 마을이 있었고, 1876년 부산항이 정식적으로 개항을 합니다. 왜관은 조선 초기부터 작지만 존재했습니다. 포소왜관이라하여 항구에 만들어진 작은 일본인 마을입니다. 동래의 부산포, 웅천 제포가 그곳입니다. 1426년에는 울산 염포에 왜관이 설치되면서 '삼포왜관' 체제로 돌아가게 됩니다. 1547년에는 모두 사라지고 부산포 왜관만 남게 됩니다. 처음에는 지금의 좌천동역이 있는 두포모에 설치되고, 이후에 용두산공원 주변인 초량왜관으로 옮겨 가게 됩니다.
일제 강점기
부산항의 이동
한일강제합방 이후 부산은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일본은 전 조선에서 수탈한 쌀, 소금, 면화를 중심으로 한 물자들을 부산항으로 철도편으로 가져왔다. 수많은 물자로 인해 공간이 비좁아지자 일본은 드디어 현재의 중앙동을 매립하기 시작한다. 1910년 현재 세관 부지와 여객부두를 매립한다. 당시 항만은 현재의 중앙동에, 철도는 초량에 있어 서로 거리가 있어 물자를 다시 옮겨야 하는 불편함 있었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영선과 영국 영사관산을 깎아 마다를 매립하기에 이른다. 부산역이 현재의 중앙동 세관이 있는 곳으로 이동하게 된다. 그곳은 제1부두가 된다. 그로 인해 항과 철도가 만나 원활하게 물자를 옮길 수 있게 된다.
매립은 1-3차에 걸려 이루어짐으로 현재의 부산항의 틀이 만들어지게 된다. 영도를 잇는 연륙교가 건설 되면서 부산항은 자갈치를 중심으로 한 남항과 세관이 있는 북항으로 분립하기에 이른다. 북항은 일반적으로 북항을 일컫는다. 부산 사람도 이 사실을 모르는 이들이 많다.
항구와 철도
고속도로가 만들어 지기 전까지 대부분의 물자는 배로 운송되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일본이 들어와 철도를 놓았기 때문에 그전까지는 모두 항만 운송이었다. 일본은 이러한 특징을 잘 알았기 때문에 강제적으로 항구를 개항하도록 한 것이다. 인천에 이어 부산은 두 번째 개항장이 되었다.
부산이 부산다움을 갖게 된 것은 바로 일본의 강제적 개항 때문이다. 그로 인해 부산은 어쩔 수 없이 양가적 감정이 존재한다. 하나는 식민지 수탈의 공간으로서의 반항심이고, 다른 하나는 일본으로 인해 부산이 거대한 도시로서 성장하는 것에 대한 고마움이다. 실제로 부산은 1980년대 중반까지 서양문물이 들어오는 입구로서의 역할을 감당했다. 이 부분도 나중에 따로 다룰 것이다. 하지만 서서히 항공이 발달하고, 서울 중심으로 바뀌면서 부산은 제2의 도시로서의 역할만 감당하게 된다. 부산은 90년대 450만 정도의 거대한 도시였지만 2023년 3월 현재 3,315,516명이다. 2040년 부산의 인구는 382만 명까지 하락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항구로서 가장 먼저 개항한 부산은 서구식 근대건물과 기관들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영사관을 비롯하여 병원, 우편국, 은행, 상업회의소 등은 매우 상징적인 건물들이 된다. 이후로 부산은 전 조선에 신문물을 전파하는 첨병과 같은 항구가 된다.
개항장이 되면서 부산의 중심은 동래에서 초량으로 이전하게 된다. 1905년 초량에 경부철도 종착역이 만들어진다. 원래 초량은 조선 사람들이 거주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철도역이 생기면서 이곳은 일본인들의 차지가 된다. 모든 문량은 부산항에 모였다. 일본과 가장 가까웠기 때문이다.
해방 이후
해방후 중국과의 교역
해방 이후 일본이 남겨준 공장과 건물에 사람들이 들어가 살고, 사업을 이어갔다. 일본과의 무역은 단절되고 홍콩과 중국과의 무역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1946년 대중국 무역 비중은 81.4%나 되었다고 한다. 일본의 단절과 중국과의 교역의 활성화는 부산이 사그라지고, 대신 인천이 중요한 항구로 떠오르는 역할을 하게 된다. 일제강점기 시절 줄곧 제1관문의 역할을 하던 부산이 해방 후 인천에게 자리를 내어 주었다.
한국전쟁, 위기가 기회로
하지만 중국과의 교역은 오래가지 않았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중공군이 전쟁이 개입하며 1.4후회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 사건이 <굳세어라 금순아>의 배경이 된다. 압록강까지 올라갔지만 중공군이 개입하며 다시 후퇴를 하게 된 것이다. 그 과정 중에 흥남부두에서 미국이 자신들의 군용 물자를 싣으려 했다. 하지만 수만 명의 피난민이 몰리면서 물자를 버리고 피난민을 실은 일화는 아직도 유명하다.
<굳세어라 금순아>를 부른 현인을 기념하여 만든 현인노래비. 영도대교를 건너 영도 초입부에 자리한 영도경찰서 바로 앞에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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